두 사람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믿고 의지할 만한 누군가가 항상 옆에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큰 행운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가져다 준 두 사람의 그 행운에 마음속으로부터 큰 박수를 보냅니다.

평생을 같이 하겠다는 두 사람의 용기 있는 결단이 아니었다면, 그런 행운은 어려웠을 겁니다.

 

아무리 서로 사랑하고 떨어지기 싫어 같이 살고 싶다고 해도,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평생을 같이 하겠다는 결단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두 사람이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차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 태어나서 자란 환경도 다르고, 생각과 취향에서도 크고 작은 차이가 있기 마련이며, 사소한 사안 하나하나에도 의견의 차이가 있기 마련입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한 지붕 아래에서 같이 산다는 것은, 두 사람 사이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사랑이 차이를 지우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이름으로 차이를 지우려고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라 폭력이 됩니다. 사랑이 클수록 더 폭력적으로 되는 것도, 이처럼 사랑의 이름으로 차이를 지우려 하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일심동체’라는 것은 부부 중 어느 한 사람의 주도 아래 다른 사람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지우려는 폭력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일 뿐입니다. 남편이 됐든 아내가 됐든 힘이 있는 어느 한 사람의 생각과 취향에 다른 한 사람의 생각과 취향을 종속시키는, 그러면서도 그 종속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일 뿐입니다.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부부는 같지 않습니다. 같을 수도 없고 같아서도 안됩니다. 부부가 같아지는 순간, 이미 그 부부사이에는 권력관계가 형성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일심동체’는 이미 부부 사이의 권력관계가 작동한 결과일 뿐입니다. 남편이라는 혹은 아내라는 추상적 이름을 씌우고 상대에게 자신과 같아질 것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상대방에게 종속을 요구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자신의 남편은 남편이기 전에 ‘임아무개’라는 개인이고 또 자신의 아내는 아내이기 전에 ‘성아무개’라는 개인입니다. 남편과 아내이기 이전에 이처럼 서로 다른 개인과 개인의 만남이기 때문에, 부부는 공유하는 바도 많지만 공유할 수 없는 것도 많습니다. 부부는 그러니까 ‘일심동체’라 아니라 ‘이심이체’인 것입니다.

훗날 아이들이 생기면 더 많은 마음과 몸들이 같이 살아가야 하는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 역시 한 사람 한 사람이 고유한 인간 개인이기 때문에 부모나 형제 자매 간에도 생각이나 행동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가족이라는 것은 이처럼 서로 다른 복수의 마음과 몸들이 한 지붕 아래서 다르게 살아가는 단위입니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되 타협을 통해 갈등을 최소화하면서 공생하지 않는 한, 그 가족은 가부장적 독재에 시달리거나 해체될 수밖에 없습니다.

살다 보니, 부모-자식이나 형제-자매 관계는 물론 부부관계까지도 작은 국제관계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제국-식민지 관계는 부부나 부모-자식 사이에도 형성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먼저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이데올로기에서 벗어 나십시요. 부부로서 한 지붕 아래 삶을 같이 누리면서도 서로 다른 인격적 개체로서 서로의 차이를 인정할 때, 싸우면서도 정드는 남편과 아내로 따듯하고 힘차게 살아 갈 겁니다.

‘이심이체’인 이 두사람이 함께 하는 앞길에 행운이 가득하길 빕니다.

 

*이 주례문은 임지현 교수가 실제 제자의 결혼식에서 낭독한 주례문입니다.